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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가 이사하면서 생긴 일 #1에 이어서..

(별일도 아닌 것을 길게 쓰는 재주가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당분간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사 다음날인 화요일에 역삼동에서 오전 10시에 미팅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출근시간과 비슷하게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비가 내리고 상쾌한 아침이었다. 미팅도 중요하지만 오는길에 공구상가에 들를 일이 설렌다.

 

참고로 나는 아내와 가끔 백화점을 가면 그렇게 힘들 수가 없다. 하는 것도 없는데 너무나 피곤하다. 그런데 한 번은 같이 공구상가에 간 적이 있다. 아내가 너무나 힘들어하며 내게 말했다. "오빠, 쇼핑하러 가면 맨날 힘들다더니 이 기분이야?" 그렇다. 그런가보다.

 

우리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매우 큰 공구 백화점이 있다. 이름은 에이스하드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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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29 | 지도 크게 보기 ©  NAVER Corp.

예전에 지나가다가 잠깐 들러본 적이 있는데 매우 큰 규모로 공구를 전시해 놓고 파는 일종의 공구 백화점이다. 1층밖에 가보지 않았는데 3층까지 있다고 한다. 1층만 제대로 구경해도 시간가는 줄 모르는 곳이다.  

출처: 네이버 지도
에이스하드웨어 내부 전경(출처: https://blog.naver.com/ttlkes/221679452305), 사진을 못찍어 두었다.;;

 

뭘 사야하는지 나도 모르는 상황

 

사실 뭘 살거라고 정해두지는 않았다. 다만 생각해둔 방법은 세탁기의 양쪽 벽과 세탁기를 어떤 도구를 사용해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것이다. 전날 사용한 철봉과 비슷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구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들어가서 어슬렁 어슬렁 구경을 하면서 이것저것 둘러보았다. 그나마 비슷해보이는 것이 클램프라는 공구였다. 

목공용 클램프 (출처: 네이버쇼핑)

클램프를 실제 사용해본 적은 없으나 비슷하게나마 모니터를 잡아주는 암의 지지대를 책상에 고정시키는 용도로 사용해본 적은 있다. 나사부분을 돌려서 집게처럼 생긴 부분이 꽉 다물어지게 해주는 도구로, 어떤 물건을 단단하게 붙여야 할 경우에 사용한다. 그러나 나는 뭔가를 붙이는 상황이 아니라 반대로 밀어줘야 한다. 

 

대충 공구 코너를 두세바퀴 돌았으나 쓸만한 물건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한 직원분에게 물어봤다. 

 

"제가 공구는 잘 모르지만, 무거운 물건을 들어주거나 밀어주는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구가 혹시 있나요?"

 

딱히 그런 물건이 없는 것 같다고 한다. 밀어주는 물건이라고는 냉장고같은 물건을 위로 들어올려서 이동할 때 사용하는 물건이 있다고 한다. 찾아보니 바닥에 바퀴가 달려서 물건을 이동할 때나 유용하게 사용할만한 도구였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두리번 거리며 물건을 찾다가 아까 직원보다 고참스러워 보이는 직원이 지나가시길래 다시 물어보았다. 이번에는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드렸다. 그랬더니 뭐 유압식 리프팅 도구 비슷한 것을 찾으시는 것 같다며 대형 장비 말고는 없다고 이야기하신다. 

 

낯익은 도구를 발견했다.

 

아직 시간은 많고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공구코너가 아니라 반대쪽 인테리어 관련 코너쪽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문고리, 나무 합판, 전등 이런 것들이 여러 종류 모여있는 곳이었다. 그러다가 낯익은 것을 발견했다. 해군에서 함정근무를 하면서 종종 사용했던 물건이었다. 

 

턴버클 (출처: 네이버 이미지)
와이어 등에 연결해서 장력을 이용해 큰 물건을 고정시킬 때 사용한다.

내가 탔던 상륙함에서는 탱크나 장갑차 등을 바닥에 고정할 때 주로 사용했다. 고정할 물건에 연결한 와이어와 땅에 고정된 와이어를 턴버클 양쪽에 연결하고 턴버클을 돌려서 잠그면 와이어에 장력이 생겨서 단단히 고정시킬 수 있다. 그때는 사람 종아리만한 크기의 턴버클로 무게도 꽤 나갔다. 그것과 똑같이 생겼지만 크기는 훨씬 작은 턴버클이 사이즈별로 수납함에 담겨있었다. 

 

턴버클의 원래 목적은 물건과 물건을 잡아당겨서 장력을 만들어주기 위함이다. 하지만 반대로 사용하면 물건을 밀어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원래 연결되어있는 고리대신 뭔가 납작한 물건으로 교체해야될 것 같다. 이 물건을 가지고 아까 그 직원분에게 가서 그렇게 사용할 수 있는지 물어보니 볼트로 교체가 가능할 것 같다고 한다. 

 

볼트를 이용하면 될 것 같다.

가장 작은 턴버클 8개를 골랐다. 그리고 그 턴버클에 맞는 볼트를 찾았다. 그리고 볼트의 머리는 면적이 좁기 때문에 벽이나 세탁기에 압력이 가해지면 움푹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벽과 볼트 사이에 넣어줄 얇은 철판을 찾았다. 

철판 총 8개를 샀다.

이렇게 고른 도구들을 아래처럼 사용할 생각이다. 

세탁기와 벽사이에 힘을 주어 단단히 고정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 외에 수평계도 사고 뭐 이것저것 필요해 보이는 것들도 함께 구매했다. 다해서 2만원대의 금액이 나왔다. 집에 도착해서 일을 좀 하고 저녁시간이 되어서 세탁실 작업을 시작했다. 

어두워서 거실에서 사용하는 조명을 가져왔다.

문제4: 생각지 못한 턴버클의 특성

 

우선 턴버클의 양쪽 고리를 모두 빼고 볼트로 교체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모든 턴버클의 고리를 먼저 뺐다. 그리고 볼트를 돌려 넣는데 이상하다. 아무리 돌려도 들어가질 않는다. 혹시 몰라 반대쪽을 시도해보았다. 이번에는 들어간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턴버클  특성상 턴버클을 한쪽 방향으로 돌리면 잠기거나 풀려야 하기 때문에 한쪽은 볼트의 나사선이 역방향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볼트는 한쪽밖에 사용할 수가 없다. 이제와서 역방향 볼트를 사려면 다시 마트를 가거나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은 한쪽은 볼트를 끼우지 않고 테스트만 해보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다. 

문제5: 미끄러지는 볼트와 좁은 공간

 

바보같은 시도였다. 일단 볼트의 머리 면적이 좁기 때문에 힘을 줄수록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이리저리 미끄러진다. 반대쪽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대충 수직으로 각도가 맞으면 힘을 받기는 한다. 그러나 너무 어렵다. 어깨에 쥐가 날 것만 같다. 온 몸에 땀이 난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났다. 용.접.

철판과 볼트, 턴버클을 용접해서 붙이면 가능할 것 같다. 얼른 컴퓨터로 뛰어가서 근처 용접사가 있는지 네이버지도로 검색을 해보았다. 집근처 몇군데가 나온다. 용접기구를 파는 곳을 제외하고 특수용접을 해주는 곳이 대충 세 군대 정도 보였다. 한 군데씩 전화를 걸어보았다. 하나는 받지 않고, 하나는 일이 끝나셨다고 한다. 아마 7시 반쯤 되었던 것 같다. 마지막 한 곳은 8시 반에 문을 닫으니 올거면 빨리 오라고 한다. 대충 위치를 보니 차를 타고 15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른 턴버클, 철판, 볼트를 봉지에 담아서 차를 타고 이동했다. 

 

용접을 맡겼던 독산동의 한인특수용접

디버깅3: 용접으로 미끄러지는 버그를 잡자!

 

공장 앞에 차를 세우고 들어갔다. 생각 외로 내 나이대의 젊은 분들이 세 분 정도 일을 하고 계셨다. 좀 전에 전화드린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고 용접할 위치와 도구들을 보여드렸다. 알류미늄은 안된다고 하셨는데 다행히 모두 쇠붙이였다. 최대한 수직으로 붙여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개당 오천원이라고 하셨으니 4개 세트면 총 2만원이었다. 멀리 떨어져서 작업하시는 걸 지켜봤다. 

 

10분정도 걸린 것 같다. 모두 작업이 끝나고 물에 식힌 다음 완성된 턴버클을 확인했다. 마음에 든다. (사진이 없어서 아쉽다.) 계좌이체를 해드리고 다시 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차를 타고 오면서 생각했다. 세탁기 아랫부분의 지지대가 불안정하니까 세탁기 양쪽 하부에 턴버클을 두 개씩 앞뒤로 고정시키는 것이 좋지 않을까? 집에 도착해서 바로 시도해봤다. 

세탁기와 벽사이에 설치한 턴버클(실제 용접된 모양)

아내도 어느새 퇴근하고 집에 왔다. 네 군데 설치를 모두 마치고 세탁기를 돌려보았다. 대충 필요없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탈수를 할 때까지 기다렸다. 원래 탈수전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처음부터 지켜보기로 했다. 코딩을 하면서 디버깅할 때의 마음가짐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곧 탈수 사이클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돌다가 점점 회전속도가 빨라졌다. 괜찮다 싶었는데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다시 진동이 시작되었다. 예상과는 달리 세탁기의 윗부분의 진동이 매우 심했다. 그래도 전날 진동보다는 왠지..조금 줄어든 느낌이 든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회전시 원심력의 중심이 하단부가 아니라 좀 더 윗부분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했다. 그래서 턴버클의 위치를 바꿔보기로 했다. 탈수가 끝나고 다시 행굼을 하는 사이에 얼른 양쪽의 턴버클 두 개를 빼서 위쪽으로 옮겨 설치해 보았다. 

세탁기 좌측
세탁기 우측

다시 탈수 사이클이 되기까지 기다렸다. 아내와 세탁기 앞에 나란히 서서 세탁기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살면서 세탁기가 탈수하는 모습이 이렇게 재미있기는 처음이었다. 다시 탈수를 시작했고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진동이 언제 나타나려나 싶었는데 탈수가 끝나버렸다. 엥? 된건가? 아내가 나를 경이로운 얼굴로 쳐다봤다. 진동이 조금 있었지만 이정도는 평평한 바닥 위에서도 생길만한 진동이 아닐까 생각했다.(순전히 내 추측이다) 이전에 있었던 심한 진동과 소음은 더이상 나지 않았다. 

 

세탁이 모두 끝났다. 내친 김에 세탁을 한 번 더 돌렸다. 좀 전에 끝난 세탁물은 건조기를 돌렸고, 다시 세탁이 시작되었다. 한 시간 가량을 세탁기 앞에 있었다. (작성한 코드를 테스트를 하는 개발자의 마음으로) 기다리기 지루해서 책도 읽었다.

그리고 걱정했던 진동은 없었다...!

 

디버깅 종료

휴... 세탁기 고정기 작업 끝났다. 이제 세탁실을 볼 때마다 뿌듯하다. 문제없이 돌아가는 코드를 보는 느낌이랄까.

누가 이 글을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아내는 재미있게 읽어줬으면한다.

이상 끝.

 

세탁기야 오래오래 튼튼히 나를 위해 일해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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